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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정상화(Normalizing Suffering): 우리는 왜 아픔을 당연하게 여길까?

by 코기의 숨 2025. 3. 8.

고통의 정상화(Normalizing Suffering): 우리는 왜 아픔을 당연하게 여길까?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고통을 겪는다. 친구와의 갈등,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경제적인 어려움,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순간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런 고통을 마주할 때 종종 "다들 힘들어", "원래 그런 거야", "세상이 원래 불공평하지" 같은 말을 듣거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가곤 한다. 이처럼 개인이 겪는 고통을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고통의 정상화(Normalizing Suffering)’라고 한다.

이 개념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철학, 심지어 정치학에서도 자주 논의된다. 단순히 개인의 정신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떻게 개개인의 고통을 다루고, 때로는 무시하며, 때로는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고통을 정상화하는 걸까? 그리고 이 과정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고통의 정상화(Normalizing Suffering)
고통의 정상화(Normalizing Suffering)


1. 고통의 정상화란 무엇인가?

‘고통의 정상화’란 개인이 겪는 어려움이나 아픔을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원래 회사 생활이 다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거나,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 "세상은 원래 냉정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개념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인지적 적응(cognitive adaptation)과 연관이 있다. 인간은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고통을 피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정신적인 부담을 줄이려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반복되면 본래는 부당한 고통조차 문제 삼지 않게 되고, 심지어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2. 우리는 왜 고통을 정상화하는가?

(1) 생존 본능: 덜 아프기 위한 자기 합리화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합리화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상사가 부당한 대우를 하더라도 "어차피 다들 그렇게 살아"라고 생각하면, 그 부당함에 대해 싸우기보다는 감정을 억누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덜 힘들어진다.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부당함에 무뎌지고,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2) 사회적 문화와 규범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규범이나 가치관 역시 고통의 정상화를 부추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 그래서 고된 노동이나 희생을 성공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고, 지나친 업무량이나 학업 부담도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 고통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다 그렇게 사는 것"이 되어버린다.

(3) 비교를 통한 무뎌짐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고통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설득한다.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덜 힘들어"라며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런 비교는 때때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결국 고통을 외면하고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4) 주변의 반응: 공감 대신 무시

고통을 이야기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너만 힘든 게 아니다", "다들 참고 살아" 같은 반응을 보이면, 점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느끼게 된다. 결국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게 되고, 고통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3. 고통의 정상화가 가져오는 문제점

(1) 부당한 상황이 지속됨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면, 그 고통을 만들어낸 구조적인 문제를 바꾸려는 시도가 줄어든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지나친 야근이 당연시되면, 직원들은 이를 문제 삼기보다는 참고 일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조직 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2) 개인의 정신 건강 악화

고통을 외면하면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에서 쌓이게 된다. 결국 스트레스, 우울증, 불안장애 등의 정신 건강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통을 정상화하는 것이 순간적으로는 감정을 덜 힘들게 만들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3) 공감 부족과 인간관계의 단절

사회 전체가 고통을 정상화하면, 결국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문화가 약해진다. 누군가 힘들다고 말했을 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 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면, 결국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게 된다.


4.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정상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1)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솔직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건 당연한 거야"라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왜 이렇게 느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2)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

누군가 힘들다고 이야기할 때, 단순히 "나도 그랬어"라고 넘기기보다는, "그게 정말 힘들겠구나"라고 공감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작은 태도 변화가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3) 부당한 상황에 문제 제기하기

직장에서, 학교에서, 또는 가정에서 부당한 일이 반복될 때,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모든 문제를 바꿀 수는 없지만, 작은 것부터 바꿔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4) 사회적 구조 변화 요구하기

고통을 정상화하는 문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더 건강한 노동 환경, 공정한 교육 시스템, 따뜻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5. 고통은 정상적이지만, 정상화될 필요는 없다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고통이 존재하는 것과,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는 때때로 "그냥 그런 거야"라는 말에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고통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것이 계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고,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할 때, 비로소 건강한 사회와 개인이 만들어질 수 있다.